넷플릭스 <메시아> 수치심

넷플릭스가 없는 코로나 시국은 상상할 수 없다. TV가 없는 우리 집에는 더 여가시간 넷플릭스 의존도가 높지만 <킹덤, 나의 삼촌, 비밀의 숲, 종이의 집, 오티스의 비밀상담소, 마인드헌터, 빨강머리앤, 홈랜드, 슈트> 등 어느 정도 유명한 영화나 시리즈를 거의 섭렵한 뒤 별다른 끌림이 없어 방황하던 중 보석 같은 작품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 이름에서 심상치 않은 <메시아>다. 사실 제목이 주는 종교적 느낌이 불편해 추천 목록에 아무리 올라 있어도 모른 척했지만 평소 취향과 거리가 먼 시리즈를 접하는 것도 사고 저변을 넓히는 것이라고 믿고 시청을 시작했다. (솔직히 볼 작품이 너무 없었다.) 한 편을 보자마자 알았다. 넷플릭스에서 오래전부터 왜 그렇게 나한테 추천했는지. 그야말로 스트라이크 드라마였다.

종교 얘기인 건 맞지만 내게는 수치심 얘기로 다가왔다. 마음 어딘가에 숨겨 들키고 싶지 않은 진실,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진실이 누군가에게 들켰을 때 일어나는 수치심. 굳이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더라도 이미 스스로 부끄럽다는 감정을 느끼고 있지만, 그것이 밖으로 꺼내는 순간의 수치심은 상상도 할 수 없다. <메시아>의 주인공은 사람들의 수치심을 찌른다. 누군가는 그 찌르기가 너무 아파서 주인공을 경멸하고, 누군가는 그 찌르기 덕분에 수치심을 드러내며 주인공을 숭배한다.

주인공이 사람들의 수치심을 정확히 파악하고 만지는 것만으로는 그가 메시아라고 단정할 수 없다. 내가 주목한 것은 주인공의 정체가 아니야. 그의 말에 반응하고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모습이다.(게다가 미국 대통령도 주인공 앞에서 약해짐) 이 작품을 보면 인간에게 신념이라는 수치심을 극복시킬 수도 있지만 수치심을 더욱 공고히 할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수치심을 드러내는 것이 자신의 신념을 배신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수치심의 발현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일 것이다. 결국 수치심이 만천하에 나타난 인물은 스스로 무너지고 반대로 수치심을 드러낸 뒤 자유로워지는 인물도 등장한다. 그 중 가장 빛나는 인물은 주인공을 따르는 청년 지브릴인데, 그는 죽어가는 도중 수치심을 스스로 드러냈다. 옷을 홀딱 벗고 자신에게 총을 겨누는 사람을 향해 걸어가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숭고한지 적군마저 총을 내려놓았다.

우울할 때 넷플릭스에서 가끔 보면 힘이 나는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한 장면이 있다. 주인공 이선균이 스스로 아내의 외도 사실을 밝히기로 하면서 “부끄러운 건 상관없어, 더 행복해질 수 있다면”이라고 말하는 대목이다. 간단해 보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진짜 약점, 가장 부끄러운 모습, 부끄러움을 스스로 밝히는 것이다. 부끄러움을 겪었을 때 더할 나위 없이 자유로워질지 숨도 쉴 수 없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노출된 결과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에 대부분 어떤 결정도 하지 못하고 숨기고 산다. 누군가 자신이 믿는 신이라는 존재로만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아저씨’에서 이선균이 ‘메시아’에서 지브릴이 스스로 옷을 벗고 속을 드러내는 것이 숭고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들이 향하는 대상 때문이다. 신이 아닌 그들의 약점을 잡고 공격하려고 준비 중인 적군 앞에서 부끄러움을 드러냈으니 그들의 용기는 대단한 것이다.

내가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수치심이라는 감정에 주목하고 그것을 드러내는 것을 매우 높이 평가하는 것을 보면 솔직한 사람들에게 무한한 매력을 느끼는 것을 보면 옷을 벗고 사진을 찍어 전시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진행한 것을 보면 내 내면을 파악할 수 있다. 나는 기회만 있으면 수치심을 드러내고 조금이라도 자유로워지고 싶은 욕망이 감도는 사람이다. 욕망에 비해 용기가 조금 약해 잘 드러내지 못하지만 이렇게 일기를 쓰거나 영화나 소설로 대리만족을 하면서 푼다. <메시아> 같은 작품을 만났을 때 용기가 조금 난다. 누구에게나 있는 부끄러움 정도의 약점, 그것을 드러냈을 때의 부끄러움,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니 계속 드러내보라고 응원하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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